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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혜나눔] 왜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살려달라는 이방 여인의 간청 앞에서 굳이 침묵하셨을까?
글쓴이 장순호
날짜 2026-04-04
조회수 2489

왜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살려달라는 이방 여인의 간청 앞에서 굳이 침묵하셨을까?

응답 없는 기도가 우리에게 먼저 묻는 것

20260331

 

기도가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던 경험을 한 번쯤 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간절했고, 분명 진심이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냉담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버려진 것 같은 감각을 남깁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그 경험과 정확히 닮은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북쪽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오늘날 레바논 해안가 근처에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귀신 들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성경은 그녀를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린 딸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태복음 15:23). 제자들까지 나서서 그녀를 보내버리라고 청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제야 말씀하셨지만 이번에는 거절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태복음 15:24). 그럼에도 여인은 다시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5:26)였습니다. 침묵, 거절, 그리고 모욕에 가까운 말씀. 세 겹의 벽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우리 자신이 그 여인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그런데 구했는데 받지 못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4:2-3).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을 때도 그렇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사야 59:2)이 설명들은 다 맞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질문이 남습니다. 구하고 있고, 순수한 마음이며, 딱히 가리는 죄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 이유들이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데도 침묵이 온다면, 우리는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요.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런데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이 말씀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고난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진짜로 의지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때로 우리를 그 질문 앞으로 데려가는 방식입니다.

 

고난이 믿음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시험은 성적을 올리기도 하지만, 그전에 내가 얼마나 공부했는지를 먼저 드러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믿음을 만들기 전에,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먼저 꺼냅니다. 물론 시험 기간이 길어지면 공부량이 늘어나듯, 고난이 길어지면 그 안에서 믿음도 함께 자랍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7).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세 번의 벽이 필요했던 것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열 명의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당시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감염을 우려해 마을 밖으로 쫓겨나야 했고, 사람이 가까이 오면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도, 예배도 모두 잃은 삶이었습니다. 그 열 명이 예수님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7:13).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가는 길에 열 명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 단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가복음 17:17-18). 쉽게 주어진 것은 쉽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쉽게 얻지 못했고, 그렇기에 쉽게 흘려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세 번의 벽 앞에서 물러서기는커녕 더 깊이 엎드렸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태복음 15:27). 이 말은 논리적 반박이 아닙니다. 완전한 항복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신뢰입니다.자신의 자격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자비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여인의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조차 솔직히 가져가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마가복음 9:24).

 

예수님은 마침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8).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발굴입니다.예수님은 이 여인 안에 있던 것을 세 번의 벽을 통해 끝까지 꺼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나도록,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분을 더 깊이 붙들도록 이끄시는 초대였습니다. 그 초대 앞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 번의 벽을 넘은 이 여인 곁에 예수님이 계셨던 것처럼, 응답 없는 침묵의 자리에도 그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오늘 응답 없는 기도 앞에 서 있다면, 그 침묵이 묻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PS

매주 성경을 읽다 보면, 오래된 이야기가 신기하게도 오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 공간에 올리는 글들은 본문 앞에서 한 사람이 품었던 질문을 따라가며 걸어간 묵상의 방향일 뿐, 확정된 진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우리 시대의 언어로, 우리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로 다가가는 작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본문을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른 울림을 받을 수 있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 보면 말씀은 더 넓고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이 저에게는 더 깊은 이해의 시간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한 주간을 살아갈 따뜻한 응원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나눔을 통해 우리의 묵상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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